23화 - 아름다운 박수연  
작가명 : 에로화가
등록시간 : 10-17 | 조회수 : 10
고딕
명조
연성

 

자동차 라이트 켜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안개등에 의지한 채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길을 나섰다. 스쿠프는 엔진이 아닌 중력의 힘으로 스르륵 굴러간다.

 

무사히 돌아와야 한단 생각뿐이었다.

 

민박집의 조명을 벗어나자 길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수연은 의자 깊숙이 얼굴을 묻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대영 운전 잘한다...”

 

그녀가 속삭이듯 중얼거린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속 5km/h인데... 너무 빠른가?”

 

가로수의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천천히 훑고 지나간다.

 

“아니... 딱 좋아...”

 

우린 잠깐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야릇한 미소가 비쳤다.

강촌의 달빛 아래, 나는 수연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과 애들 밥은 챙겨 먹고 저러는 거니?”

“그러게...”

 

“저녁 안 먹었지?”

“응?... 으응...”

 

“배고프지 않아? 나는 좀 출출한데...”

“응. 나도 배고파.”

 

콧소리였다.

코끝이 막혀 끝이 울리는 콧소리를 수연이 낸 것이다.

 

“오다가 역 근처에 슈퍼를 봤는데... 가볼래?”

“멀잖아. 괜찮겠어?”

 

이젠 대답도 바로바로 잘해준다.

 

‘박수연은 사실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닐까...’

 

운전은 어렵지 않았다.

내리막길에선 브레이크를, 오르막에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됐고, 작은 동네라 큰길만 따라가면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시동만 꺼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 됐다. 마주 오거나 뒤따라오는 자동차도 없었다.

 

“산책할 겸.... 다녀오자.”

“응! 좋아!”

 

그녀의 목소린 풀벌레가 이슬을 먹을 때 내는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 못 한 탓에 길은 어두웠지만, 하늘엔 보름이 되어가는 커다란 달이 떠 있었고 달빛 주위로 달무리가 퍼져있다.

“그런데, 밤이 늦었는데 문 열었을까?”

 

수연이 내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열었을 거야. 여긴 강촌이잖아.”

 

차츰 어둠에 눈이 익자, 서서히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무리를 진 별들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와~”

 

우린 거의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별 진짜 많다.”

“이런 거 처음 봐!”

 

수연에겐 모든 경험이 낯선 듯했다. 스쿠프는 플라타너스의 그림자를 밟으며 소리 없이 움직였다.

 

벌레 소리와 달빛이 나무 그늘 사이로 스며든다. 강가에서 밀려온 밤안개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가 살갗에 닿았다. 깊은숨을 들이쉴 때마다 청량한 바람에 수연의 살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세상의 모든 고백이 성공할 만큼 아름다운 밤이었다.

 

“넌 우리 과에서 누구랑 친해?”

“아직 잘 모르겠어.”

 

“입학한 지 두 달 되어가잖아.”

“특별히 친하다고 느낀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아... 난 연선 누나랑 친한 줄 알았어. 요즘 함께 다니길래...”

“교양과목도 겹치고... 옆자리니까...”

 

“왜? 언니가 내 얘길 해?”

 

실수였다. 연선누나 얘긴 꺼내는 게 아닌데...

 

“아냐! 전혀!”

 

우리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달콤한 꿈을 꾸다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연선과의 설명하기 힘든 하룻밤... 혜영누나를 잠시 짝사랑했던 일... 그리고 어젯밤 10살 차이나는 원장님과의 첫 경험...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고, 수연에게 설렜던 내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도착했어.”

 

의외로 슈퍼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다행이네. 문을 열었어.”

 

기어를 빼고 핸드브레이크 레버를 당기려는데... 브레이크가 채워져 있었다.

 

‘이런 멍청이!’

 

“안 내려?”

“어, 잠시만...”

 

난 이미 잠겨있는 브레이크 레버를 풀었다 다시 당기며 <끼기긱> 소리를 만들었다. 멋있고 남자다운 소리라 생각되었고 스스로 대견했다.

 

기차역 입구의 슈퍼마켓은 식료품보단 폭죽 재료 등의 잡화를 주로 판매하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히 사갈 물건이 보이질 않았다.

 

“라면 사갈까?”

 

가장 큰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는 라면이 제일 만만해 보였다.

 

“애들이 많이 사왔던데...?”

“아, 그으래...”

 

바닥 한쪽 소쿠리에 담긴 고구마가 보였다.

 

“그럼 고구마 구워줄게.”

“응. 뭐든 좋아.”

 

우린 다시 차에 올랐다.

움직일 때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의 감각이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원장님 죄송해요...’

 

그런데도 나는 지금 수연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수연아 미안...’

 

장 본 물건을 무릎에 올려놓은 수연이 빙긋이 웃었다.

 

“너 즐거워 보인다.”

“응, 재밌어. 소꿉장난하는 것 같아.”

 

하얀 입김을 내며 웃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아마 오늘밤엔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 *

 

“아직 춥지? 불 놓아줄 테니 잠깐 기다려.”

 

가스 불에 라면 물을 올리자마자 난 마당의 장작더미로 향했다.

 

“아냐, 난 괜찮은데... 너 귀찮잔아...”

 

수연은 손사래를 치지만 빨개진 코는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있었다.

 

“어차피 오늘 써야 하는 장작이야...”

 

불 꺼진 민박집은 빈집처럼 고요했다.

나와 수연을 제외한 98학번 동기들에겐 만취한 기억만 남은 두 번째 엠티일 것이다.

 

나는 수북하게 쌓여있는 더미에서 마른 장작 몇 개를 골라냈다.

 

“쪼갤 시간 없으니까 얇은 거로 골라 때자.”

 

그리고 장작의 결을 따라 긴 갈기를 만들었다.

 

“그건 뭐 하는 건데?”

 

어느새 수연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베이비로션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불쏘시개로 쓸만한 잔가지가 없을 땐, 장작을 사자 갈기처럼 찢어주면 불이 잘 붙어.”

 

“넌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어릴 때 산에서 자랐거든... 간솔과 잔가지 모으는 게 내 일이었지.”

“정말? 재밌었겠다.”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는 노름꾼이었고 가족 모두가 비닐하우스서 살던 적도 있었다.

 

“생각만큼 재미있진 않었어.”

 

수연이 부러워 한 아리고 고단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힘들었구나... 너도.”

“아냐, 지금 생각해보니 즐거운 기억도 많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생도 알고 보면 그리 즐겁진 않은 경우가 많지...”

“풉, 너도 그런 말 할 줄 알아?”

 

“너 뭐야... 나 놀리는 거야?”

“아냐아냐, 고생 모르고 자란 얼굴 같아서...”

 

“그러니? 내가 그렇게 보이는구나...”

 

‘화르르’

 

불은 어렵지 않게 붙었다.

 

“와~ 신기하다!”

“따뜻하지?”

 

“정말 불이 붙었어.”

“잠깐 기다려. 라면이랑 고구마 함께 먹자.”

 

여러 겹의 호일을 둘러싼 고구마를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잠에선 깬 누군가가 나온다 해도 나눠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양이었다.

 

“고마워, 윤대영...”

“그냥 이름만 불러. 어머니가 부르는 것 같아서 별로야.”

 

나의 어머니는 새엄마였다.

 

“크크크.”

“정말이야...”

 

불의 온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난 모닥불 보는 거 좋아하거든...”

“부럽다. 난 처음 보는데.”

“정말?”

“응.”

 

“불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네 유전자에 기억이 남아있나 보다.”

“유전자?”

 

수연의 목소리가 가늘고 낮아졌다.

 

“우리 조상들이 수렵 활동하던 시기 말이야.

숲에 천적이 있던 그런 시대...”

 

“어? 응. 그래.”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안했겠어. 하지만 이런 모닥불을 피웠다는 건 하루를 무사히 보냈고, 안전한 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거잖아. 그런 안도감이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있는 거래...”

 

“재밌네. 그럴듯해.”

“그 수업 재미있지?”

“응?”

 

“우리 함께 들었잖아. 건축학 개론. 교수님이 해준 얘긴데...”

“아... 그랬어?”

 

“역시... 잊었구나.”

“미안, 잊은 건 아니고 내가 결석을 많이해서. 흐흐.”

 

“아니야, 교실에 있었어.”

“내가 강의실에 있었다고?”

 

“네가 어디 앉았는지도 기억하는 걸.”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며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수연은 나를 꽤 오랜 시간 관찰하고 있었다. 연선누나의 말대로 수연은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던 것일까.

 

“자, 잠깐만. 장작 좀 넣을게...”

 

불을 키워놓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전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수연은 피하지 않고 빙긋 웃는다.

 

“물, 물 끓어!”

 

난 마루 위에 놓인 가스레인지 곁으로 도망쳤다.

김치를 꺼내놓고, 나무젓가락을 벗겨 수연에게 건네주었다.

 

“흐음~ 냄새가 좋아!”

 

이렇게 활짝 웃는 수연의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모닥불을 옆에 두고 밥상 너머의 그녀와 마주 앉았다.

 

“자~ 이제 먹자.”

“와~”

 

냄비 뚜껑을 받아든 수연이 웃는다.

 

“정말 소꿉장난 같아!”

 

<호로록~>

 

“맛있어?”

“콜록콜록, 응. 너무 맛있어.”

 

기침 때문인지 그렁그렁한 눈빛이었다.

 

“내가 먹은 라면 중 제일 맛있어!”

 

난 잿불에 묻어둔 고구마를 꺼내왔다.

 

“호호, 불면서 조심해서 먹어.”

 

절반쯤 깐 군고구마를 수연에게 내밀었다.

 

“조심해서 먹어야 해.”

“응.”

 

“나 살던 동네에 사나운 개가 있었어.”

“개? 멍멍 짖는?”

 

“응. 그 개가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니까 주인도 못 알아보고 더 사나워진 거야. 함부로 옆에 못 다가갈 정도였지.”

 

“응, 그래서?”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진흙 바른 무를 불에 구워 개에게 던져줬어.”

 

“무우?”

“응, 밭에 나는 무.”

 

“그럼 어찌 되는데?”

“무는 익으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거든. 진흙 발린 뜨거운 무를 덥석 물은 개는 뱉지도 못하고 이빨이 홀랑 빠졌데.”

 

“어우~ 너무하다... 그래서?”

“그래서?”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수연에게 냇가에 걸린 가마솥 얘기를 꺼낼 순 없었다.

 

“그냥 뭐... 이빨 없는 얌전한 개로 살다가 죽었지.”

“아잉... 불쌍해....”

 

“그러니까 너도 고구마 조심해서 먹어.”

“깔깔깔.”

 

나도 함께 웃으며 고구마를 작게 베어 물었다.

 

“응? 맛이 왜 이래?”

 

봄은 맛있는 고구마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계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고구마는 단맛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내다 버리기 직전의 상태였다. 겨우내 싹을 낸 고구마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보다 못한 심각한 맛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고구마가 잘못된 것 같아. 이렇게 맛없기가 쉽지 않은데...”

 

“아냐, 라면이랑 먹으면 맛있어.”

“못 먹겠으면 그만 먹어.”

 

“정말이야. 이렇게 맛있는 고구마 처음 먹어봐.”

“그래?”

“응!”

 

그녀는 콜록거리며 냄비뚜껑 위의 라면을 입으로 가져간다.

 

‘수연은 좋은 아이구나...’

 

박수연 같은 아이가 나를 좋아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마흔 명에 가까운 동기 중 누구도 잠에서 깨거나 우리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함께 곁불을 쬐며 단물 빠진 고구마를 먹던 그 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봄날이 선물한 마지막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