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게임사전에 빚 따위!-9편  
작가명 : 앵거바델
등록시간 : 10-14 | 조회수 : 12
고딕
명조
연성





[허튼 수작질은 관둬라!]


스테인이 다시 도끼를 내리쳤다. 방금 밀려난 것은 그저 장난으로 치부했다. 도끼가 바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고, 골드릭도 퍼뜩 정신을 차려 칼을 들이댔다. 그대로 부딪치면 쥐포가 되기 십상. 그는 뒤로 밀려날 준비를 하며 발에 힘을 풀었다.


땅!


[크윽?!]


하지만 밀려난 것은 스테인이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한 발자국 정도. 그래도 분명 스테인이 힘에서 밀렸다. 방금 상태창이 보여준 메시지가 진짜다. 골드릭은 어안이 벙벙하다가, 급격히 차오르는 자신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는데?’


근력을 시작으로, HP나 MP 회복 등이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저 최상위급 유저와도 비견될 수준이다. 정면으로 당당하게 싸울 수 있다. 그는 물러나는 대신 칼을 고쳐 쥐었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망하겠지만. 침착하자.’


그러나 이성은 한층 차가워졌다. 스텟 증가로 들끓기에는, 아등바등 살아온 게임 인생이 아깝다. 골드릭의 머릿속이 이기기 위한 작전을 짜냈다. 상사에게 안 혼나려 노력할 때처럼 치열하고 집요하게.


[이상한 사술을 썼군. 인간!]


‘저쪽이다.’


스테인의 도끼가 좌우로 크게 돌았다. 회전을 크게 주느라 다리 사이가 크게 벌려졌다. 골드릭이 재빨리 그곳으로 몸을 낮춰 파고들었다. 체면은 고이 접어서 던져버렸다.


서걱!


[껑! 껑! 깨앵!]


차마 들어줄 수 없는 처량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테인은 사색이 되어, 다리 사이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지켜보던 지원부대들이 기겁해 얼굴을 돌렸다. 드라몬도 헛웃음을 지으며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저놈 저거 또 저런다. 사람한테는 같은 남자라며 안 하더니, 몬스터한테는 가차없네.”

“사람에게 안 하는 것만으로도 어디야. 우웩! 보기만 해도 속 뒤집어진다.”


옆에 있는 녹색 단발 여자가 맞장구 쳤다. 드라몬의 길드 선배이자 궁수 부대 단장 알바레아였다. 자기 키보다 커다란 활을 든 그녀는, 궁수에 어울리는 눈썰미로 방금 참상을 똑똑히 지켜봤다. 저절로 헛구역질이 다 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는 확인하셨어요? 갑자기 저렇게 강해지는 건 이상하잖아요.”


물론 골드릭이 각성하는 순간도 깡그리 캐치했다. 알바레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으니까.


“확인이야 했지. ‘벼랑 끝에서의 발악’ 업적이었나? 저걸 실물로 달성하는 유저는 처음 봐.”

“그 업적이라고요? 진짜로?”


전해들은 드라몬도 귀를 의심했다.

벼랑 끝에서의 발악.

소설 속 히든처럼 꽁꽁 숨겨진 비밀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게임 사이트 정보란에 당당히 등재된 정식 업적이다. 버프로 떡칠된 특전도 당연히 유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달성자가 없었는지 묻는다면…….


“이야~ 잡탕이라고 말은 했는데, 정말 죽여주는 잡탕이었구나. 그걸 달성할 정도였다니.”

“그러게 말이다. 나라면 업적 깨느니 계정을 새로 팠을 거야.”

“그래야죠! 조건 달성하려다가 꼼짝없이 초보 지역에 머무를 텐데.”


조건이 정말 더럽기 때문이었다.


“다른 게임은 몰라도 여기서 저 업적은… 어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난이도 장난 아니었을걸.”


알바레아의 말대로, 업적 조건 자체가 게임 성향하고 맞지 않았다. 고수들에게조차 이빨이 무뎌지지 않는 난이도다. 업적 채워본답시고 시도하기에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고 해야 할까.


“엄청 성장하기는 했는데, 객관적으로는 우리 단장들 정도야. 밸런스 무너뜨릴 스펙도 아니지. 고생은 몇 배로 하고서 그걸 바라는 애가 몇이나 되겠니? 저놈이 독한 거라고.”

“한 번 꽂히면 뒤가 없는 녀석이긴 해요. 이렇게 실감할 줄은 몰랐지만요.”


골드릭만을 위하진 않았으나, 딱 골드릭에게 맞는 업적이었다.

이루는 날이 딱 오늘이었을 뿐이다.


“가만 있어보자. 강해진 건 차치하고, 타격은 어떻게 주는 걸까요. 버프만이면 우리랑 조건은 같지 않나?”

“개 같이 고생해야 얻는 업적이잖아.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라도 있나 보지.”


의문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저 보스는 분명 힘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놈이었다. 홈페이지에서 안 알려준 특전이 또 있었나? 그러다, 드라몬이 한 가지 가정을 내놓았다.


“아! 아까랑 다른 부분이 하나 있네요.”

“뭔데.”

“혼자 싸우고 있잖아요. 아까 우리랑 다르게.”


그녀가 손으로 골드릭을 가리켰다. 스테인의 빈틈에 칼을 쑤셔 넣고 물러나는 그가 보였다. 주변에는 그 어떤 동료도 없었다. 그랬다. 1:1 싸움이었다.


“일대일로 잡아야 되는 보스였다고?”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요. 우리랑 차이점이라면 그거 하나니까요.”


드라몬과 알바레아가 허탈해했다. 저런 간단한 조건이 있었을 줄이야. 알았다면 진작 단장 하나만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의 허탈함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어지는 사실 하나를 깨달아서였다.


‘그럼 쟤 혼자 싸우게 둬야 하잖아?’


이 보스전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둘이 초조한 눈빛으로 골드릭을 쳐다봤다. 업적 달성 전에 이미 소모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제한된 자원만으로 보스 이기기가 가능할까.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불안했다.


‘나 아니면 못 잡는다… 일 리가. 혼자서 잡아야 되는 놈이네.’


동시에, 골드릭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같잖은 영웅 심리는 일찍 접어두었다. 게임은 공정해야 제 맛. 그에게 주어진 특혜는 업적 특전으로 끝이었다.

스테인은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아직도 가랑이가 따끔거렸다. 반드시 죽이겠다! 데미지라는 확고한 도발이, 주변에 있는 다른 적들이나 아군을 사고 알고리즘에서 지워버렸다. 그가 도끼를 한 손에 들었다.


“2페이즈라, 이거냐.”

[이걸 꺼내기는 처음이다. 죽일 가치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등에 매어둔 대검 하나가 끌러 나왔다. 패턴 변경이다. 고비를 하나 돌파하고 다른 고비가 맞이했다. 골드릭은 칼을 쥔 손의 장갑을 바투 매었다. 곧바로 스테인이 공격을 가했다.


파앙!


거리를 좁히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새빨간 검기가 좌우를 가르며 날아왔다. 골드릭의 반격은 상하로 휘두르기. 몇 배로 강화된 푸른 검기가, 빨간 검기의 중앙부를 정확히 타격했다. 폭발과 함께 흙먼지가 치솟았다.


[하아!]


스테인은 흙먼지를 강행돌파하고 접근했다. 물렁해진 땅이 그를 맞이했다. 거기에 매캐한 독까지 겹쳐졌다. 늪 만들기 스킬이 최고조를 찍을 때 발동되는 특성. 독으로 이뤄진 늪이었다.


‘버프를 받으니 이렇게도 되네? 그럼 이것도!’


시험 삼아 해봤는데 쏠쏠했다. 발이 푹 빠져 중독된 스테인을, 골드릭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스급에게는 성공 확률이 낮은 저주. 그렇지만 버프는 장식이 아니다. 저항력을 뚫고 스테인에게 저주가 새겨졌다.


[끄어억…….]


발을 움직일 수 없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강력해진 지속 데미지가 겹치기까지 하니 장난 아니다. 스테인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누구, 마음대로!]


도끼와 칼로 늪을 내리찍는 스테인. 쥐어짜낸 검기와 충격파가 늪을 헤집었다. 설치형 스킬이 막대한 타격을 받고 박살 났다. 골드릭은 충격을 뒤집어쓰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예상 범위 이내였다.


‘힘은 충분히 소모시켰어. 다음은…….’


[이젠 네놈 차례다.]


낮게 으르렁거리고, 스테인이 몸을 돌렸다. 칼과 도끼의 무게를 축으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이 끝부분을 중심으로 맹렬히 피어 올랐다. 필살기이리라. 이 이벤트 보스는 2페이즈에서 선물이 후했다.


“그걸 먹어주면 내가 바보지. 안 그래?”


골드릭이 칼을 놓고 양팔을 땅에 박았다. 끈적끈적해진 땅이 솟아나 벽을 이뤘다. 필살기는 무조건 피한다. 그 뒤를 도모한다. 부족한 힘으로 보스를 사냥해온 약삭빠른 비결이었다.


[다 뚫어주마!]


스테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골드릭도 회복되는 MP를 계속 벽 쌓기에 투자했다. 흡사 테트리스처럼 쌓고 또 쌓았다. 빠르게 10겹 정도 올렸을 즈음, 스테인과 그가 만들어낸 회오리가 첫 번째 벽에 부딪쳤다.


쿵!


[끄아악!]

“다들 스플래쉬 데미지 주의해! 안전거리 벌려!”


벽에 막힌 데미지 판정이 주변으로 번졌다. 달려들려던 다른 낭인들과 구경하던 탈렌시아 길드원들이 휩쓸렸다. 드라몬은 전면으로 나서 방패를 자처하고 동료들을 후퇴시켰다.


‘그래, 짜샤. 한 번 보스도 잡고 그래야지.’


속으로는 거칠게 게임 친구를 응원했다.


쾅! 쾅! 쾅! 쾅!


벽이 하나 둘씩 깨졌다. 회오리도 차츰 약해졌다. 누가 먼저 바닥나느냐의 싸움이다. 먼지가 봄철 황사 같이 자욱한 가운데, 대피한 낭인과 플레이어들이 싸움을 지켜봤다. 볼거리 하나는 기똥찬 싸움이었다.


쿵…….


마지막 벽 깨지는 소리는 둔탁했다. 낭인들이 경악하고 플레이어들이 반색했다. 스테인의 필살기가 먼저 소모되었다! 이윽고 결판이 났다.


[컥, 끄륵, 꺽.]


가래 끓는 기괴한 신음이 들려왔다. 먼지구름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서로 뒤엉킨 골드릭과 스테인. 스테인은 골드릭의 칼에 목을 찔렸다. 털 색깔과 비슷한 핏물이 갑옷과 바닥을 적셨다. 골드릭의 추레한 옷에도 피가 튀었다.


“휴우! 아슬아슬했네.”


골드릭이 칼을 손에서 놓고 안도했다. 한 번 더 운이 좋았다. 필살기에서 너무 소모한 덕분에 3페이즈가 넘어간 것이다. 벽치고 버티기가 옳은 전략이었다.


<월드 이벤트 ‘위대한 반격’ 1차 돌발 전역 종료. 보스 ‘가호 받는 스테인’이 토벌 조건에 맞춰 토벌되었습니다. 토벌 유저는 골드릭.>

<골드릭 유저에게 토벌 상금과 드랍템, 이벤트 공적 포인트가 적립됩니다.>


무기질적인, 그럼에도 기분 좋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돈 굴러오는 소리와 똑같았다. 밀물 들어오듯 차오르는 인벤토리도 참 오랜만이었다. 환호할 기력도 없었지만, 양팔을 쭉 뻗어 승리를 자축했다.


“수고했어. 스텟에 안 기대는 싸움은 훌륭했고.”


드라몬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이 골드릭을 만족시켰다. 게임을 하면서 처음 듣는 칭찬이 좋았다. 별 것 아닌 가상세계의 성취인데도 뿌듯했다.


“오늘 운수 되게 좋은 날이야. 안 그래?”

“그럼! 너한테나 나한테나 운수 좋지. 너는 실력 뒷받침해줄 스펙이 생겼지, 나는 단련시켜줄 좋은 인재 생겼지.”

“뭐, 뭐?”


괜한 사족만 없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제 똥스텟 걱정은 없어졌잖아? 스텟에 맞게 훈련해야 앞으로도 좋지 않겠냐. 쉬는 시간마다 싸우는 법을 머리에 팍팍 심어줄게. 특전 얻은 김에 1위 한 번 찍어보라고!”


‘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