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게임사전에 빚 따위!-8편  
작가명 : 앵거바델
등록시간 : 10-13 | 조회수 : 16
고딕
명조
연성








즉석에서 인원들이 선발되었다. 골드릭을 제외하면 전원 단장들의 측근이나 해당 부대에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었다. 골드릭은 괜히 찔려서 그들을 외면했다.



“보스의 비정상적인 방어력이 버그가 아니라면, 정찰로 얻는 정보가 그만큼 중요해진다. 딴청 피우지 말고 철저하게 조사해라. 돌멩이 하나도 허투루 넘겨선 안 된다. 알았나?”
“알겠습니다!”


단장의 신신당부에 우렁차게 대답하는 이들. 골드릭도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 크게 소리쳤다. 드라몬은 황새 따라잡는 뱁새 구경하는 기분으로 낄낄댔다.
잠시 후, 정찰대는 팝콘 튀기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조를 짜거나 뭉쳐서 다니진 않았다. 비효율적이거니와, 눈앞에 아른거리는 공적 포인트가 개인행동을 유발했다. 독차지할 기회를 남에게 양보할 바보가 어디 있을까. 보스를 잡으란 것도 아니니 행동이 대범해졌다.


‘와~ 빠르기도 해라.’


골드릭이 앞서나가는 이들을 보며 감탄했다. 똑같이 출발했는데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스텟을 기른 놈들다웠다. 저들보다 먼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려나.


‘조금 특이한 곳을 찾아볼까? 같은 방향으로 가면 어차피 허탕인데.’


그는 멈춰 서서 다른 방향을 택했다. 똑같아서는 뒤꽁무니만 졸졸 쫓게 생겼다. 느리다면 눈썰미라도 잘 발휘해야지. 옅은 흙먼지를 등지고 구석진 계곡을 향해 달렸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발자국이 있긴 있네, 그래도.’


다행히 허탕은 아니었다. 몇몇 낭인들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 표면이 깨진 돌들이 보였다. 억센 발톱이 깎아낸 자국들. 빠르게 달아나려고 발에 힘을 준 모양새였다.


‘위? 어휴, 힘도 좋으셔.’


발자국을 따라갈수록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깎아지르는 절벽이 보였다. 이걸 올라가야 되나?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각도가 의지를 꺾었다. 하지만 골드릭은 그걸 이겨내고 손을 뻗었다. 돌을 잡은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초반에 점수를 따놔야 나중이 편해진다, 이거야! 누가 움츠러들 줄 알고?’


쉬려면 나중이 아니라 이후에.
그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절벽을 올랐다. 행군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잡다한 스킬이 은근 도움되었다. 다들 장애물 돌파 스킬을 찍느니 다른 길을 찾으리라.


달그락! 딱!


“아… 무서워 죽겠네.”


허나 절벽은 쉽게 껍질을 내어주지 않았다. 손을 뻗고 발을 디딜 때마다 자갈이나 조그만 파편이 후드득 떨어졌다. 돌 떨어지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삐끗하면 자신도 저 조그만 돌덩이처럼 떨어지리라.


“읏-차!”


그래도 꿋꿋이 오르고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발자국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장하다 골드릭! 그는 쾌재를 부르며 절벽 위로 완전히 올랐다.


“흡!”


정확히 말하자면, 오르려고 했다.


[대장,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글쎄다. 그냥 고요하군. 잘못 들었겠지.]


고개를 크게 들었다가 바로 내렸다. 방금 내가 뭘 봤지? 분명 털 복슬복슬한 낭인 놈들이었는데. 골드릭은 안간힘을 써서 눈만 빼꼼 들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듯이, 저편에 낭인들이 있었다. 게다가 한 놈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이걸 어쩌지. 올라가면 바로 들키겠다.’


이벤트 보스다.
보자마자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행운이라기에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 이대로 올라가면 다굴을 맞게 된다. 한 놈씩 처리해야 안전한데, 포위당했다간 그대로 게임 오버였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잠깐만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리 중 하나가 이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삘이라도 꽂혔나 보다. 괜한 짓 말라는 대장의 말도 무시하고 다가오는 녀석. 골드릭이 입술을 깨물고 고심했다. 절벽에 매달린 채 들키거나,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거나.


‘염병, 괜히 혼자서 움직였네.’


뭘 택하든 답이 없는 갈림길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기껏해야 몇 걸음. 조금만 있으면 들켜버린다. 골드릭은 선택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벗어날 길은 하나뿐이다.


‘하나, 둘, 셋!’


그가 배와 허리에 힘을 주고 튕겼다. 적당히 찍은 체술 스킬로, 몸이 활시위처럼 부드럽게 튕겼다. 낭인은 갑자기 나타난 발에 놀랐다.


[뭐, 뭐야?!]


퍽!


대답은 내려찍기로 돌아왔다. 한 바퀴 빙글 돌아서 낭인의 머리를 때린 것이다. 털북숭이 몸을 지지대 삼아 착지한 골드릭. 그는 남은 체술 스킬 효과에 힘입어 낭인을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낭인이 절벽 밖으로 밀쳐졌다.


[컹! 컹! 컹!]


울부짖는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떨어지는 소리 후에는 침묵. 경험치와 전리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골드릭이 나머지 적들을 맞이했다.


[뭐냐, 쥐새끼였나?]
“아이고… 다시 봐도 크네.”


단장들을 상대한 이벤트 보스도 훤히 보였다.


[아까 다른 인간 놈들하고는 결판을 못 냈는데 잘 되었어. 내 도끼는 써는 맛을 느껴야 날카로워지거든. 네놈을 제물로 삼아주마!]


피안개꽃 언덕에서 상대한 놈들처럼 빨갰다. 차이점이라면 색이 어두침침하다는 것. 피처럼 검붉은 털이 피비린내를 풍기는 듯했다. 들고 있는 도끼도 혈관 같은 것이 표면을 뒤덮었다. 흉측스러웠다.


“흥, 누가 그대로 당해준대?”


골드릭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절벽을 뒤로 하고 몬스터들을 맞이하니, 과장 조금 보태서 나락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맨 앞에 나선 보스와 양 옆에 자리한 부하들이 벽을 이뤘다.


‘그렇지만…….’


이대로 싸우면 자살 행위다.
여기서 싸운다면.
골드릭은 잔망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하늘 무너진 자리에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동아줄이 하나 보였다. 글씨 새기듯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파낸 자국. 벼랑길이다.


‘뭐, 맞아 죽는 것보단 낫겠네.’


자칫 넘어지면 떨어뜨린 토마토 꼴이 되겠지. 골드릭이 심호흡을 하고 옆으로 뛰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벼랑길을 타고 내려가는 그. 싸움을 준비하던 낭인들이 기가 막혀 했다. 설마 꽁무니를 뺄 줄이야.


[이놈이 감히 도망을!]
[대장, 쫓아갑니까?]
[너희들은 돌아서 내려가라. 우회해서 갈 만한 길을 막아놔. 멍청한 놈! 저렇게 내려가면 못 쫓아갈 줄 알고?]


대장 낭인이 코웃음을 쳤다. 커다란 몸뚱이의 낭인들이니 벼랑길을 못 쓴다고 생각했겠지. 맞는 판단이기는 했다. 그, ‘가호 받는 스테인’이 상대가 아니라면.


쿵…….


“무슨 소리… 세상에나.”


신나게 내려가서 도망치던 골드릭은, 뒤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랐다. 정체를 확인하고선 두 배로 놀랐다. 상대가 그대로 절벽을 뛰어내린 것이다. 저러고도 안 죽었어? 기껏 부린 꾀가 쓸모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토막을 내주마!]
“크윽.”


안타깝게도 망설일 틈이 없었다. 가호 받는 스테인이 금방 돌진해왔다. 급한 대로 칼을 빼 들어 막는 골드릭. 붉은색 빛이 그를 덮쳤다. 쩌렁쩌렁한 폭발음과 진동이 그를 괴롭혔다.


쩌엉!


‘젠장. 겉보기 그대로인 놈이냐?’


엄청난 압력에 팔이 꺾일 뻔했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부여잡고, 주술을 걸어 팔 근육을 강화하고 나서야 간신히 막았다. 어찌나 강한지 막고도 데미지가 들어왔다. 손아귀에서 핏물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아직 안 끝났다, 인간 놈!]


스테인의 공격은 그거로 그치지 않았다. 달려드는 자세를 멈추더니 똑바로 도끼를 내리쳤다. 골드릭은 다시 막을 자신이 없어 땅바닥을 굴렀다. 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충격파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핏빛 늑대는 지치지 않고 공격을 날려댔다. 도끼 자체도 무서운데 충격파마저 장난이 아니다. 골드릭의 얼굴에 금방 식은땀이 가득했다.


‘하나라도 맞으면 죽겠어. 뭐 방법이 없나?’


사냥은 포기했다. 애초에 단서나 찾으려고 나온 정찰. 목숨 걸고 싸울 용기나 의리 따윈 없었다. 페널티로 돈과 장비 잃기는 사양이다. 골드릭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주술사였나? 먹물 묻히고 다니는 주제에 칼이라니. 진짜배기 전사도 아니니, 벨 맛이 아무래도 떨어지겠어.]
“나도 내가 어중간한 놈인 거 아니까, 그렇게 자극해봤자 소용없거든? 괜히 시비 털지 말고 싸움이나 계속하자고.”
[입을 나불대는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고. 다음 공격으로 박살내주지.]
“누가 그러지 말랬나. 대장 자리는 말재간으로 땄나 보네.”
[흥! 같잖은 도발 따위.]


길드 입단시험 때보다 많은 주술을 썼다. MP 아까워서 꺼둔 패시브들도 하나 둘씩 발동했다. 알음알음 익혀둔 다른 클래스들의 스킬도 덤으로. 미친 듯이 바닥나려는 MP는 물약을 빨아가며 보충했다. 일생일대.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대규모 스킬 중첩이었다.


‘단 한 방, 하나만 막아내고 바로 튀자. 그 다음이 돌아갔다가, 나중에 정찰을 다시 하자고.’


여태껏 불리함을 감수해본 적이 없었다. 밀릴 것 같으면 무조건 도망. 빚이 걱정되어 몸을 사린 지가 몇 개월이다. 숫제 게임이 아니라 현실 같았던 나날들.


‘이건 후퇴가 아니야. 이것만 먹이고 다음에 다시 온다, 빌어먹을 똥개 녀석!’


더는 그러기 싫었다.
원정에 참여한 계기를 떠올리며, 골드릭은 새삼 의지를 불태웠다.


띠링! 땡!


마지막 스킬 발동음과 MP가 바닥났단 경고음이 함께 울렸다. 그걸 신호로 삼아 골드릭이 돌진했다. 스테인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도끼를 높이 들었다. 달려오는 그대로 두 동강을 내버릴 심산이다.


“이야아아아!”
[그대로 예쁘게 잘라주지!]


볼품없는 칼날과 사람 몸통 만한 도끼날이 부딪쳤다.
귀가 먹먹해졌다. 골드릭은 몸을 뭉개버릴 위력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다. 다리만 멀쩡하면 도망칠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으, 응?’


살짝 눈을 떠보았다. 칼이 부러지지도, 팔이 박살나지도 않았다. 배운 스킬에는 없는 오색 오라가 그를 휘감고 있었다. 스테인의 도끼는 거기에 막혀 힘없이 밀려났다.


[뭐냐, 이건?]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둘 다 기세를 잃고 어안이 벙벙했다. 오류라도 난 걸까. 틈을 타서 도망치려던 골드릭의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창 하나가 나타났다. 스텟과 스킬을 개판으로 찍고선 본 적 없는, 업적 관련 상태창이었다.

<업적 달성 : 벼랑 끝에서의 발악.>

<업적 조건 : 전투시에 여러 클래스의 스킬 동시 사용 100/100.>

<업적 특전 : 업적 전용 버프 패시브 스킬 발동. 전 스텟 및 스킬 레벨 상승.>

<최초 업적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골드릭의 게임 인생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뀌는 순간.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래.”


전투음을 듣고 빠르게 달려온, 드라몬 휘하 중장기병대들은 졸지에 증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