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게임사전에 빚 따위!-7편  
작가명 : 앵거바델
등록시간 : 10-12 | 조회수 : 17
고딕
명조
연성








“이 게임은 진짜… 스테미너 소모도 표현을 개떡같이 하네.”
“말은 정확히 해야지. ‘개떡같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게 그거네 뭘.”


이동을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일행들은 슬슬 입에서 단내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다리는 근육이 당겨오고, 발은 딱딱한 땅을 밟느라 쑤셔왔다. 현실에서의 행군처럼 몸이 반응했다. 망할 개발자 놈들! 새삼 이 게임의 장점이자 단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넌 안 힘들어? 힘들면 같이 태워주고.”
“됐습니다요. 척 봐도 기승 스킬 높아야 되는 말이잖아. 그리고 아직은 버틸 만해. 스테미너 충분하거든.”


골드릭은 그나마 멀쩡한 편이었다. 의외로 그의 스테미너 수치는 높았다. 다른 고렙 유저들과 비교해도 월등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걸 말해주는 당사자는 탐탁지 않아했다.


“아아, 그것도 그거냐. 똥스텟.”
“묻지 말아줘. 생각만 해도 속 쓰려.”


스테미너는 그리 많이 필요한 스텟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오래 걷는 일이 게임에서 잦을 리가. 그러므로 스테미너 스텟이 높다는 건, 다른 스텟에서 마이너스가 있단 소리였다. 결국 훌륭한 똥스텟의 증명이다.


“아무렴 어때. 가면서 징징대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스테미너 하도 안 찍은 놈들이 많아서, 그런 애들 걸러내느라 힘들었다고. 그러잖아도 적은 인원에서 더 줄여야 했어.”


드라몬이 가벼운 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약간은 다행이란 태도가 섞여있었다. 입이 줄면 개개의 몫도 커지기 마련. 골드릭이 그 속내를 읽고 피식 웃다, 뒤편을 엄지로 가리켰다.


“그러는 저쪽은?”


탑뱅커가 팔자 좋게 마차에 늘어져있었다.


“상인한테 스텟 따져서 뭐하게. 적당히 따라올 수 있으면 그만이야. 왜, 부러워?”
“부럽기는 개뿔. 얼른 눈에서 사라져줬음 좋겠다고. 괜히 남 오는데 끼어들어서는.”


입술이 오리 주둥이가 될 만큼 투덜대는 골드릭. 그러나 투정 부린다고 있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았다. 탑뱅커도 뒷담을 들었는지 그를 쳐다봤다. 그러다 홱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따지면 네가 끼어든 거지. 네가 오기 전에 탑뱅커를 고용했으니까. 탈렌시아 제일의 상인을 내버려두고 보급이라니, 가당키나 하겠어?”
“그건 그렇지. 쓸데없이 현실적인 게임이야, 진짜.”


중요도를 따지면 탑뱅커가 드라몬보다도 높았다.
이번 원정지에는 NPC상인이 없어서였다.
레콩기스타 온라인은 NPC마저도 이용난이도가 높았다. 호의는 초보 유저들에게만. 적당히 실력을 기른 유저들은, 같은 유저에게서 필요한 소모품을 사야 했다. 상인 클래스가 그럴 때 가치를 빛냈다.


“물약을 충분히 가지려면 드랍템으론 턱도 없어. 길드 소속인 상인들은 레벨이 모자라고. 결국은 저 아가씨뿐이지. 아르타헤나까지 따져도 저만한 유저 없을걸.”


착용하는 장비를 장인이 만든다면, 쓰는 물건은 상인이 만든다. 레벨이 높을수록 만드는 양이나 질도 엄청나다. 탑뱅커에게 원정대의 작전능력이 걸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알았으니 잔소리는 그쯤 해둬. 우리 어디까지 온 거야? 낭인들 영토는 진작 접어들었잖아.”
“글쎄. 숙영 가능 장소까지는 아직 멀었어. 출발 전에 듣기로는, 자정까지는 계속 걸어야 한다나. 주말이니 그나마 다행이네.”
“이번 이벤트 동선, 분명 군대 갔다 온 놈이 짰겠네. 이런 행군 강요라니. 쳇!”


할 말이 없어서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야 할까. 야생성 넘치는 낭인의 영토답게, 길은 포장되지 않고 구불구불했다. 황토색 뱀이 구불구불 땅 위에 누운 듯했다. 저 끝에 원정대가 바라는 목표가 있으리라.


“낭인들이 점령한 지역을 수복하고 그들의 대장을 처치하라… 이게 조건이었지?”


골드릭이 손을 꼽아가며 이벤트 내용을 되뇌었다.
레콩기스타 온라인은 억압받는 인간이 아인종 적들과 맞서는 이야기. 이번 초대형 이벤트는 방어를 넘어서, 처음으로 빼앗긴 땅에 파고드는 스토리였다. 그래서 위대한 ‘반격’이다.


“응. 보스 이름은 제보당, 중간보스는 로보와 블랑카. 이름 하나 기똥차게 지었어.”
“전부 늑대 관련 이름이네. 어렵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전설로 회자되는 괴물과 현상금이 걸렸던 유명한 늑대들. 모르긴 몰라도 이름값은 할 터였다. 벌써부터 늑대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어찌나 생생한지 다른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아우우우!]
[우우우……!]


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린다고?


“기습이다! 전투 준비!”


상황을 알아차린 몇몇이 소리쳤다. 말들은 주변의 요란함에 놀라 날뛰었다. 낭인 종족이 가진 패시브 스킬 혼란. 굶주린 맹수는 소리만으로도 펫을 놀래게 하고 플레이어를 압박한다. 드라몬은 다급히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달랬다.


“정신 차려, 골드릭! 몬스터 놈들이야! 박살내고 올 테니 보급부대 지키고 있어!”


골드릭도 울음소리에 몸이 굳어버렸다. 드라몬이 그의 등을 호되게 후려치고, 말을 몰아 달려갔다. 행렬 맨 앞에는 이미 싸움 소리가 요란했다.


‘이런 썅! 방금 내가 쫄았었어?’


정신을 차린 골드릭이 자책했다. 스텟이 망했다고 정신도 빠져있었다니! 창피한 꼴을 탑뱅커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자기 뺨을 몇 번 치고서 보급행렬도 달려갔다. 남겨진 이상 뒤를 지켜야 했다.


“습격 이벤트인가요?”
“그래. 고렙 애들이 지금 진압하러 갔어.”


탑뱅커가 호신용 세검을 든 채로 맞이했다. 그녀도 긴장했는지 자세가 뻣뻣했다. 얼굴은 최대한 안 보려고 애쓰면서, 골드릭은 탑뱅커의 사각을 맡았다. 어색한 호위였다.


“이상하네요. 이벤트 안내문에 나온 던전은 아직 멀었는데.”
“이 게임은 공지글 믿다간 폭망하기 쉬워. 개발자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몬스터들 AI가 사람처럼 영악하거든. 안내문에 나온 거점 말고도 곳곳에서 나오겠지.”
“그때 당신이 당한 것처럼요?”


아, 망할.
굳이 아픈 곳을 찌르는 심보가 뭔지 묻고 싶어졌다. 그냥 두고 방어전에나 참여할까.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이 결심을 방해했다. 각양각색의 빛줄기도 보기에 무시무시했다.


퍼엉!


“오우야. 만만찮은 놈들인가 보네.”


중장기병들의 정신 사나운 금색 충격파, 검사들의 깔끔한 흰색 검기, 중장보병들의 묵직한 푸른 오라를 뚫고 붉은빛이 날뛰었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번개 같이 삐죽삐죽 했다. 저건 플레이어용 스킬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다.
분명 몬스터들이 쓰는 스킬.
최상위 유저들과도 맞먹는 위력이 간담을 서늘케 했다.


‘왜 우리는 공격하지 않는 거지. 먹잇감으로 삼기에는 이쪽이 더 적절하잖아.’


당장 이쪽으론 공격이 오지 않았다. 안심이 되는 한편 의심이 들었다. 멍청한 놈들이 아닌데 어째서 여길 내버려둘까. 골드릭은 칼을 빼들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최소한의 인원만 빼고 정면으로! 서둘러라!”
“거기 너희들도 움직여, 빨리!”


그러는 동안에도 싸움은 격렬해졌다. 폭발음은 음악처럼 그칠 줄을 몰랐고, 후방에 있던 길드 인원들도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뒤에 남겨진 인원은 기껏해야 너댓 명. 오늘 막 입단한 골드릭과 탑뱅커는 어느새 소외되었다.


“뭔가 심상치 않군요. 탈렌시아 길드는 그간 레이드를 패한 적이 없는 길드인데, 이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요? 보스랑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탑뱅커는 다른 점에서 수상쩍음을 느꼈다. 벌써 몇 분이나 지났다. 그런데도 저편의 붉은빛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정식 보스 레이드도 아닌데? 골드릭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그때였다.


꽈꽝!!


더욱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금색과 붉은색 빛이 동등한 크기로 솟아올랐다가, 썰물 빠져나가듯 사그라졌다.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쇳덩이처럼 무거운 침묵. 승리의 환호성이나 패배의 혼란함은 없었다.
뭔가 애매한 공기가 흘렀다.


“와, 왔어?”


잠시 후.
드라몬이 후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말의 하얀 갑옷이 여기저기 깨지고 검댕이 묻어있었다. 눈동자는 피로와 짜증으로 얼룩져 사나웠다. 골드릭이 그녀를 보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몬스터는. 해치운 거야, 아니면…….”
“도주했어. 부하들이랑 같이.”


대답도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목소리에 얻어맞듯 가슴이 철렁거렸다. 무슨 적을 마주쳐서 저런지 궁금했다. 골드릭은 드라몬의 불호령을 각오하고 운을 뗐다.


“어떤 놈이었어? 갑자기 나타난 그 녀석 말이야.”
“설명이 조금 복잡해. 자세한 내용은 가서 들어.”
“가, 가서?”


몬스터의 정체를 물어봤더니 뜬금없는 소환이다. 뭐 잘못했나 싶어서 제 발 저리는 골드릭. 드라몬은 이마에 힘줄을 돋우고는,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갔다. 화를 꾹꾹 눌러 담은 핀잔도 뒤를 이었다.


“따라오라면 좀 따라와! 탑뱅커, 얘 좀 빌려갈게!”
“알아서 하세요.”


‘내 신변을 왜 쟤한테 묻는 건데?!’


세트 메뉴 취급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멱살을 잡은 손길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데미지가 안 들어가는 놈?”


그래도 잡혀온 보람은 있었다.


“그래. 단장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는데도 죽이질 못했어. 체력이 높은 건지 방어력이 높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HP 회복이 빠른 건지 모르겠더라.”


습격한 몬스터의 정체는, 끌려온 반감을 씻어내고도 남았다. 랭커들이 동시에 공격하고도 못 죽였단다. 이게 이벤트 보스전의 위엄인가! 멋대로 감탄하고 두려워하는 골드릭에게, 섀클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연 설명했다.


“강한 놈은 아니었다. 공격력이 그렇게까지 엄청나진 않았어. 공략 레벨은 적정선이야. 보통 보스전이면 진작 죽였겠지.”
“버그가 아닐까요? 워낙 커다란 이벤트라, 개발사에서 실수를 했을 수 있습니다.”


드라몬이 떠올리기 쉬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버그와 게임은 바늘과 실 같은 사이다. 현재 최고의 게임인 레콩기스타 온라인도 예외는 아니리라. 다른 단장들도 그녀와 같은 의견이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딱 한 명, 섀클턴은 의견이 달랐다.


“이벤트 전역이다. 통상적인 토벌과 달라도 이상하지 않아. 조건을 만족한다든지 말이야. 이렇게 하지! 나는 운영진에게 리포트를 넣어볼 테니, 단장들은 인원을 차출하여 주변을 정찰시키도록. 수상한 건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해라.”


그가 의견들을 절충해 명령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라, 단장들 모두 이의 없이 명령을 받았다. 드라몬은 자기 부대원들에게 가는 대신 골드릭을 쳐다봤다.


“어떡할래.”
“정찰에 자원하라고?”
“후방에만 있으면 좀 쑤시잖아. 원정 내내 아무것도 안 하면 점수도 없어. 보상도 그만큼 짜게 들어오겠지.”


그녀가 은근슬쩍 행동을 부추겼다. 마침 골드릭도 호기심이 동했다. 아까 몸이 굳어버린 굴욕도 갚아야겠지.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윤택, 골드릭의 게임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분기점이었다.


“좋아. 까짓 거 가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