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게임사전에 빚 따위!-5편  
작가명 : 앵거바델
등록시간 : 10-07 | 조회수 : 20
고딕
명조
연성








“사람 너무 냉혈한으로 보지 말아요. 일정에도 없는 독촉은 관심 없어요. 계약 위반이니까.”



탑뱅커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골드릭에게는 지옥 판관의 선포처럼 들려왔다. 싸늘함이 바늘로 변해 귀를 찔러왔다. 호신용 세검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왠지 모르게 압박이 되었다.


“본론만 간단하게 말해. 1분 안에 말 않으면 갈 거야.”
“30초도 필요 없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세검이 빙글빙글 돌았다. 잘 갈린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기를 몇 번.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탑뱅커도 입을 열었다.


“빚을 탕감할 만한 일이 있는데, 하실래요?”
“…뭐?”


순간, 귀를 안 파서 잘못 들렸나 싶었다. 게임 속이니 그럴 리는 없는데. 골드릭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다시 말해보라는 제스처였다. 탑뱅커가 그의 어수룩함을 한탄하며, 재차 용건을 말해줬다.


“빚을 없앨 건수가 있다고 했어요. 망해도 반의 반, 성공하면 전부. 할지 말지 답해주세요.”
“뭔지 알아야 하든 말든 하지. 깐깐하다면서 제안을 똑바로 못하네.”


골드릭은 드라몬이 제안했을 때보다 더욱 경계했다. 신뢰도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했다. 탑뱅커는 힐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말만 했다. 로봇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마이 페이스였다.


“당신의 의지를 먼저 물어본 겁니다. 정말로 원한다면 내용을 몰라도 하겠죠.”
“그러고서 힘든 일을 팍팍 시키고?”
“빚을 반이나 줄여주는데, 쉬운 일을 기대하면 못 씁니다.”


‘말솜씨하고는.’


정말이지, 독사처럼 교활한 언변이었다. 골드릭도 골드릭대로 굳건히 버텼다. 덤터기를 두 번 쓸까 보냐. 그의 의지를 읽었는지, 탑뱅커가 숨겼던 내용을 털어놓았다.


“위대한 반격 이벤트가 시작된 건 아시겠죠.”
“모르면 간첩이지.”
“탈렌시아에서 가장 레벨 높은 상인으로서, 이번에 탈렌시아 길드의 보급을 담당하기로 했어요. 기간은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공략 성공시의 보상은 이벤트로 얻는 모든 재화의 10%. 실패할 시에도 1000골드를 받게 되죠.”
“그런데.”
“실패해도 당신에게 250골드 정도는 돌아갑니다. 그러니 최소가 반의 반. 성공시의 보상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빚 탕감을 넘어서 돈방석에 앉게 돼요.”


그래. 자초지종은 잘 들었다.
보상도 넘치도록 좋다.
그래서 뭘 바라는지 알고 싶었다. 누가 드라몬과 정반대 아니랄까, 말조차 빙빙 돌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탑뱅커는 한숨과 함께 나머지 내용을 이야기했다.


“길드에서는 보급품을 지킬 인원을 준다고 했어요. 하지만 거기에만 맡기기는 불안하죠. 당신이 추가로 호위를 맡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떤가요?”
“응, 기각.”


내용을 듣자마자 냉소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기대를 괜히 했군. 탑뱅커도 그럴 줄 알았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아직도 신경 쓰이나 보죠?”
“너라면 신경 안 쓰이겠어? 내가 이 지경이 된 이유가 그때 그 일이잖아.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빚을 떠안게 된 원인이 물건 맡기였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 같은 일을 하라고? 골드릭으로선 비뚤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를 대놓고 건드리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가.


“말했잖아요. 실패해도 250골드라고. 이번엔 물건을 잃어도 대가가 없어요. 나하고의 악감정만 생각하진 말죠? 나름 급한 일인데.”
“그럼 더더욱 거절이야. 널 위해서 일해줄 의리는 없으니까.”
“고집불통이네요, 정말.”


탑뱅커가 혀를 찼다. 객관적으로는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을. 감정이란 부분에 약한 그녀에게, 자신을 향한 골드릭의 반감은 언제나 블랙박스였다. 알기 어렵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용건 없지? 간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골드릭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더 말을 들어줬다간 화가 치밀 것만 같았다. 10골드를 던져버리려다 겨우 참았다. 싱숭생숭해졌다 바닥으로 추락한 기분을, 어딘가에 풀고 싶었다.


‘하프너, 아니, 용덕이 녀석 뭐하고 있을까나.’


아무래도 게임에서는 힘들어 보였다. 그는 오늘 했던 오프 약속을 떠올렸다. 하프너, 최용덕과의 약속 말이다. 얼른 로그아웃을 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알코올로 생각을 깨끗이 씻어야겠다.












“이 망할 길드 마스터 같으니라고. 딸꾹! 무슨 사람을 회사원 굴리듯이 굴린단 말이야. 보상이 큰 이벤트여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니냐?”


그러나 오프에서도 안식을 찾기는 글렀다.
호프집에서 술을 신나게 마신 것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용덕이 녀석이 주사를 하면서 기분이 도로 추락했다. 하필 게임 이야기냐? 골드릭, 윤택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누군 바빠서 못하는 이벤트인데, 참여하는 놈이 배가 불렀네. 내 빚 갚아주면 대신 해줄게. 어때? 잔소리 듣기 싫다면서.”
“에이~ 농담이지, 농담. 그렇게 열정적으로 게임 해보기가 얼마만인데. 부러우라고 하는 말이다, 이거야!”


‘아, 네. 그러시겠지. 이 망할 친구야!’


자랑하려고 부른 거였다니. 질투보다는 신경질이 났다. 사정 다 아는 놈이 이러면 어쩌자고! 누군 즐겁게 놀기 싫겠냐고!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하고 싶어졌다. 용덕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딸딸한 정신으로 수다를 떨었다.


“우리 아르타헤나가 제일 몬스터 영역에 가까운 건 알지? 끄윽! 그래서 이번에 아주 벼르고 있대. 팍팍 나가서 팍팍 해치운다나 뭐라나. 발 느린 나한테도 각오하라지 뭐야. 흐흐흐! 이래봬도 중장보병 클래스 중에선 가장 빠른 몸이라고. 기병 애들보다 먼저 앞서야지.”


계획 누설에 자기자랑까지 종합선물세트였다. 윤택은 더 들어주기 싫어서 얼른 맥주잔을 들었다. 용덕과 잔을 부딪치고선 재빨리 술을 들이켰다. 목이 아프도록 단숨에 삼켰다.


“야아, 너무 급히 마시는 거 아냐? 그러다 길거리 나앉아도 책임 못 져.”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히끅!”


급속도로 올라오는 취기에 마음을 달래며, 윤택은 결심했다.
남의 트라우마 자극하는 탑뱅커 녀석.
친구 속도 모르고 꽃밭에 빠진 용덕.
둘 다 화들짝 놀래게 해보겠다고.


‘오냐. 나도 모험할 줄 안다 이거야.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위대한 반격 이벤트를 향한, 마지막 망설임을 벗어버리는 순간이었다.












2040년 3월 31일 토요일, 레콩기스타 온라인 내, 식민지 탈렌시아의 길드 요새.


입단 신청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간부인 드라몬이 추천을 넣어주니,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절차가 모두 생략되었다. 평소였으면 찜찜했을 청탁. 하지만 지금 골드릭은 무엇이든 이용하기로 했다.


‘여기인가.’


그가 길드 요새를 위아래로 구경했다. 새카만 돌로 만들어진 성벽이 산처럼 굳건했다. 해자부터 탑까지 하나하나 싸움을 위한 곳.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였다.


덜컹! 쿵!


안내를 받고 들어와, 회의실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기라성 같은 탈렌시아 길드 간부들이 환영했다. 드라몬은 웃음으로. 길드 마스터 섀클턴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인 표정으로. 골드릭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 사람들이, 탈렌시아에서 제일 가는 랭커들이라는 거네.’


무협소설에서 고수들은 쳐다보기도 어렵던가. 비록 게임임에도 비슷한 압박감을 받았다. 골드릭 스스로 움츠러든 탓이었다. 섀클턴이 그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이야기는 편하게 해야 좋아.”


절이나 성당의 종처럼 중후한 목소리였다. 골드릭은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탈렌시아 길드 간부들도 따라서 자리를 앉았다.
바로 면접이 시작되진 않았다. 침묵이 무겁고 끈적끈적하게 깔렸다. 관찰하거나 눈치 보거나. 다들 말 한마디 없이, 나름대로 상대와 이 상황을 탐구했다. 특히 섀클턴과 골드릭이 머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괜찮은 유저인지 모르겠군.’
‘들어갈 수 있을까.’


침묵은 한참 이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류를 훑어본 섀클턴이었다. 어쩐지 골드릭을 보는 눈길이 복잡했다.


“클래스랑 스텟이 재미있구먼. 여러 방면으로.”
“아, 예. 조금 특이하게 육성하긴 했죠.”
“푸흐흐흐…….”


여기저기서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간부들도 프로필은 다 읽어보았다. 골드릭의 스텟과 스킬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도 확인했다. 저 ‘재미있다.’는 말은, 실상 골드릭을 깎아 내리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고난이도 사냥터들은 다녀옵니다. 기본 레벨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요.”
“레벨 값을 하는 거야, 잘 하는 플레이어에겐 기본이지.”


알면서 안 물어볼 수는 없었나. 대충 형식을 맞추는 질문에 망신살이 뻗쳤다. 골드릭은 드라몬을 봐서 표정 관리에 애썼다. 드라몬도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실적이 나쁘지 않음도 사실이야.”


섀클턴의 손길이 다른 서류로 향했다. 골드릭이 그동안 솔로로, 혹은 파티로 공략한 던전과 필드 목록이었다. 영수증 같이 빼곡한 글자가 관록을 말해줬다. 그래. 스스로 말한 대로 레벨 값은 잘 했다.


“우리 길드는 스텟에만 집착하지 않아. 실력만 증명하면 기꺼이 회원으로 영입하고. 반대로 말하면…….”
“시험에 떨어지면 턱도 없다, 라는 거겠죠.”
“잘 아니 다행이군. 그렇다면 그대로 해야겠지.”


섀클턴이 오른쪽을 돌아봤다. 시선 끝에 드라몬이 닿아있었다. 그녀는 앉은 채로 각을 잡고 길드 마스터를 마주봤다.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 날아왔다.


“사람 보는 실력이 좋기를 바라겠네, 드라몬 단장.”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스터.”


드라몬이 자신 있게 말했다.
틀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쉽진 않을 거야. 일부러 어려운 상대를 뽑으실 테니.”


실력 검증은 당장 치르기로 했다. 위대한 반격 참여가 코앞이다. 간부들끼리 아옹다옹하느니, 깔끔하게 치고 받는 결과만 보는 것이다. 실용적이다 못해 난폭한 일 처리였다.


“일부러?”
“길마가 괜히 길마겠어? 간부들 인간관계도 전부 훤히 읽고 있지.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모르긴 몰라도, 나한테 감정 안 좋은 놈을 상대로 붙이실걸.”


드라몬이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물론 골드릭은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 저쪽에서 죽기살기로 달려든단 뜻이잖아!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졌다. 드라몬은 걱정하지 말라며 두 손으로 골드릭의 어깨를 쳤다.


“어깨 움츠러들지 마.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되면 좋은 거고. 편한 마음으로 해. 빚쟁이랑 싸우기도 아닌데.”
“못 들어갈까 걱정이 아니라, 아플까 걱정이야. 보나마나 흠씬 두들겨 팰 게 뻔해. 썩어 죽을 통각 기능! 옵션으로 끌 수 있게 해주지.”
“하하하! 꼬마도 아니고, 아픈 거 싫어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어?”


게임에서 제대로 안 다쳐봤군.
박장대소하는 친구 겸 웬수에게, 골드릭이 원망 가득한 눈총을 보냈다. 레콩기스타 온라인의 통각 기능은 크게 당해봐야 안다. 그는 똥스텟 때문에 자주 다쳐봐서 잘 알았다.


“아프다고 끝날 일이 아니니… 아니, 관두자. 관둬. 다쳐보지 않은 놈한테 설명해봤자 뭐해. 어휴! 내 신세야.”
“다칠 상황을 안 만들면 그만이야. 이번 기회에 연습해봐.”


태평한 소리를 잘도 하신다. 골드릭은 친절히 가운뎃손가락을 올려주고 밖에 나갔다. 오늘 시험 대련은 저곳, 길드 내 수련장에서 치른다. 준비된 예비 무기와 심판들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잘 해내면 좋겠다.’